정조는 만약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세손에서 사퇴하겠다는 배수진을 치면서까지 《승정원일기》의 임오년 처분 기사 삭제를 요구했다. 이런 요청을 받은 조는 결국 《승정원일기》 임오년 처분 기사를 삭제하도록 했다. 만약에 정조가 《승정원일기》 기록 자체에 대한 존중심이 있었다면 삭제 요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 조는 《승정원일기》 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승정원의 업무와 관련된 기록이므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판단에서 《승정원일기》의 임오년 기사는 정치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유용하기 보다는 혼란만 부추기므로 삭제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승정원일기》를 개작하고 말살한 정조는 짧게 보면 승자라고 할 수 있으나 길게 보면 역사의 죄인이자 패배자라 할 수 있다. --- p.72「제1장 / 잘못된 길에 발을 들인 군주들」중에서
정조가 지은 《행록行錄 》에 의하면 영조는 길을 걷다 개미들이 있으면 밟지 않고 피해 갈 정도로 마음이 여렸다고 한다. 영조는 감정이 복받치면 펑펑 울기도 했으며, 감정대로 행동하다 나중에 한없이 후회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조는 마음이 여린 반면 체면을 아주...정조는 만약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세손에서 사퇴하겠다는 배수진을 치면서까지 《승정원일기》의 임오년 처분 기사 삭제를 요구했다. 이런 요청을 받은 조는 결국 《승정원일기》 임오년 처분 기사를 삭제하도록 했다. 만약에 정조가 《승정원일기》 기록 자체에 대한 존중심이 있었다면 삭제 요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 조는 《승정원일기》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승정원의 업무와 관련된 기록이므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판단에서 《승정원일기》 의 임오년 기사는 정치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유용하기 보다는 혼란만 부추기므로 삭제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승정원일기》를 개작하고 말살한 정조는 짧게 보면 승자라고 할 수 있으나 길게 보면 역사의 죄인이자 패배자라 할 수 있다. --- p.72「제1장 / 잘못된 길에 발을 들인 군주들」중에서
정조가 지은 《행록行錄 》에 의하면 영조는 길을 걷다 개미들이 있으면 밟지 않고 피해 갈 정도로 마음이 여렸다고 한다. 영조는 감정이 복받치면 펑펑 울기도 했으며, 감정대로 행동하다 나중에 한없이 후회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조는 마음이 여린 반면 체면을 아주 중요시했다. 그런 영조인지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이 같은 여린 마음과 체면 중시를 빼놓고 영조의 치세 50여 년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예컨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을 생각해보자. 조선 500년 동안 왕실에서는 갖가지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뒤주 사건은 조선 왕실 최대의 비극이며 스캔들이라 할만하다.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일 수 있었는지, 그것도 무더운 여름날 8일이나 굶겨서 죽일 수 있었는지 도무지 놀라울 뿐이다. 이런 놀라운 스캔들 이면에는 영조의 여린 마음과 체면 중시가 있었다. --- pp.139-140「제2장 / 왕과 세자, 그 지독한 부자의 악연」중에서
1479년(성종 10년) 6월 1일, 이날은 폐비 윤씨의 생일이었다. 정상적인 부부 사이다면 성종은 폐비 윤씨의 생일을 챙겨줬을 것이다. 하지만 성종은 그러지 않았다. 바로 그날 밤 성종은 폐비 윤씨 대신 다른 후궁을 찾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폐비 윤씨는 한밤중에 둘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남편 성종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윤씨는 폐위되었다. 돌아보면 성종과 폐비 윤씨는 처음엔 서로 사랑했고 둘 사이에 자 식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미움이 되었고, 그 미움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에는 이혼하게 되었다. 그들의 미움은 둘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연산군에게 이어져 나라 전체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와 관련하여 《대학연의》의 ‘극명준덕克明峻德’이라는 구절을 인용해볼 수 있겠다.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자기 마음의 덕부터 먼저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이고 자기 마음의 덕을 먼저 밝히지 못하면 그것이 자신의 비극은 물론 가정의 비극 나아가 나라의 비극이 된다는 교훈이 바로 ‘극명준덕’이다. --- pp.269-270「제4장 / 궁중 여인들의 기막힌 일생」중에서
신령군이 추천한 인물들은 대체로 이유인과 같거나 아니면 뇌물을 준 사람들이었다. 명성황후와 고종은 신령군이 추천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자들을 고관대작에 임명했다. 이들이 하는 일이란 주로 굿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예컨대 이유인은 금강산 정기를 한양으로 가져와야 나라가 태평해진다는 감언이설로 황후를 미혹시켜 금강산 1만 2천봉에 굿을 하게 했다. 그 결과 각 봉우리마다 쌀 1석과 돈 10냥을 바쳐 총 1만 2천석과 12만 냥이 허비됐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라는 비정상적으로 운됐고 국고는 고갈됐다. 결과적으로 볼 때 신령군은 명성황후의 수호 신령이 아니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황후와 고종은 사실상 일본의 포로가 됐다. 그 와중에 신령군은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투옥됐다. 뿐만 아니라 1895년에 황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그렇다면 당시 황후의 진정한 수호 신령은 무엇이었을까? --- p.334「제5장 / 외세 앞에 무기력했던 지도자들」중에서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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