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라는 문명의 입석들에게 배운
삶의 모든 것
무언가 읽고 쓰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행위다. 책은 그 행위를 완성하는 궁극의 형식이자 내용이다. 이 책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는 오랫동안 문화전문기자로서 또 시인으로서 읽고 쓰는 일을 천형으로 여겨온 저자 허연이 ‘책 읽기’라는 제의에 바치는 헌사이자 애가다. 소설가 박상륭부터 영미 현대시의 아버지 W. H. 오든, 철학자 박이문, 시대를 앞선 페미니즘 전사 케이트 밀릿, 그리고 최초로 구름의 이름을 지은 루크 하워드까지 세상을 구하고 바꾸었던 이들의 빛나는 책과 문장을 소개한다. 책의 시대 끄트머리(?)일지도 모를 오늘날, 책에게 “유일하게 뭔가를 배웠으며, 유일하게 패배했고, 유일하게 고개를 숙였던” 한 소년의 비블리오그라피가 펼쳐진다.
저 : 허연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집 다락방과 학교 근처 도서관에서 손때 묻은 고전들을 꺼내 읽으며 어른이 됐다. 고전을 만나면서 세상이 두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진리를 깨달았고, 지금도 ‘독서는 유일한 세속적 초월’이라는 말을 책상머리에 붙여놓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단행본 도서의 베스트셀러 유발 요인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시 창작에서의 영화이미지 수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게이오대학교 미디어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현재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오십 미터』, 산문집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고전탐닉』등이 있다. 한국출판학술상, 시작작품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은 한 가지를 얘기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하지만 시는 한마디가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죠. 해본 사람만이 느끼는 심오함이 있어요.
저자의 말
1 태초에 스토리가 있었다
어느 일병의 영혼을 구한 그 여름의 소설 박상륭
두뇌 자체가 도서관이었던 스토리텔러 움베르토 에코
외톨이 소년에게 책은 무기였다 장폴 사르트르
푸른 눈의 구도자 헤르만 헤세
너무 앞서 세상에 왔던 천재 작가 제임스 조이스
세밀화로 그려낸 소소하고 슬픈 삶의 단면 레이먼드 카버
일제강점기 독일에서 활약한 베스트셀러 작가 이미륵
중세적 엄숙주의에 반기 든 현대 소설의 기수 앙드레 지드
P38라이트닝 타고 떠난 영원한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
폄하됐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잠언록 칼릴 지브란
위트 가득한 애팔래치아 종주 실패기 빌 브라이슨
2 소설 읽는 시간
아버지 시대와 이별을 고함 무라카미 하루키
최초로 노벨상을 거부한 비운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검은 대륙에 바친 아름다운 서사시 카렌 블릭센
디스토피아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조지 오웰
읽을 책이 바닥나자 직접 소설을 쓴 여인 마거릿 미첼
‘모비딕’ 쫓는 광기와 대립한 스타벅 허먼 멜빌
탱고를 사랑한 남미의 정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인간은 결국 비참한 이기주의자 미셸 우엘베크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3 시의 정신
영미 현대시의 아버지 W. H. 오든
무모했지만 순수했던 시의 제사장 딜런 토머스
인간 존엄을 노래한 ‘풀잎’ 시인 월트 휘트먼
러시아 최고 서정 시인의 불꽃같은 삶 세르게이 예세닌
연인을 동토에 남겨 놓아야 했던 한 남자의 슬픔 베르톨트 브레히트
북방의 언어와 정서를 노래했던 마지막 대륙인 백석
4 철학자의 삶
생의 마지막 길, 책 싸 들고 떠난 철학자 박이문
비관은 읽지 않는 자의 변명일 뿐이다 사사키 아타루
20세기 구조주의 철학의 상징적 존재 줄리아 크리스테바
세상을 울린 어느 철학자 부부의 죽음 앙드레 고르
이성의 삶을 꿈꾼 스토아 철학자 루키우스 세네카
유형지에서 대화 이론 정립한 천재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
뜬구름 이상주의 배격한 거리의 사상가 공자
철학자들의 그리스도 바뤼흐 스피노자
현대 철학의 신성이 된 철강 재벌의 아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5 시대를 거스른 자들의 용기
시대를 앞선 페미니즘 여전사 케이트 밀릿
철학자 아버지와 티베트 승려 아들의 대화 마티유 리카르
폭력과 광기에 맞섰던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미술관에 걸린 누드는 계급이다 존 버거
준엄했지만 속정 깊었던 아버지 정약용
백과전서를 탄생시킨 프랑스혁명 사상가 드니 디드로
가장 독보적인 지적 게릴라 루쉰
검은 피부의 체 게바라 프란츠 파농
병자호란을 경고한 시대의 이단아 허균
그의 식견은 어리석은 의견들을 깨뜨렸다 박세당
종교개혁의 마중물 된 보헤미아의 신학자 얀 후스
갈등은 분별하고 차별하는 마음에서 온다 원효
6 미래의 지성을 읽다
의학계의 계관시인이자 스토리텔러 올리버 Oliver Sacks
조선의 브리태니커 쓴 최고의 셰프 서유구
『돈의 철학』으로 20세기 문을 연 사회학자 게오르그 지멜
저열하고 짐승스러운 것들과 싸워온 노학자 김우창
문학의 재판관이자 인쇄계의 군주 가스통 갈리마르
너무 많이 알아서 불행했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
강대국의 반성 외친 유엔 조사관 출신 사회학자 장 치글러
가이아 가설 제시한 대표적인 원전 찬성론자 제임스 러브록
알래스카 설원에 영혼을 바친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
최초로 구름의 이름을 지은 영국 약제사 루크 하워드
“혼 위에 뼈며 살을 입고 있다는 것은 무겁고 거추장스러우나, 그래도 그 탓에 혼은 좀 덜 추운 것이다.” (박상륭)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내가 존재한 것은 오직 쓰기 위해서였다.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쁨을 알았다.” (장폴 사르트르)
“지나간 옛날이, 사랑이 우리에게 왔지 / 한 사람은 황혼 무렵 수줍어하며 장난을 치고 / 한 사람은 두려워하며 가까이 서 있었지 / 사랑은 처음에는 다 두려우니까” (제임스 조이스)
“작가라면 다소 멍청하게 보일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가끔은 절대적이면서도 소박한 경이로움 앞에 멈춰 서야 한다. 입을 쩍 벌리고 이런저런 사물, 즉 일출이나 낡은 구두 같은 걸 멍하니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레이먼드 카버)
“국경의 강은 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중국의 도시는 거대하고 음산했지만, 저 너머 나의 고국은 모든 것이 작고 맑았다…… 매일 저녁 삼층석탑에서 들려오던 장엄한 저녁 예불이 남쪽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쏴아’ 압록강은 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미륵)
“이곳 숲에서 시간의 의미는 멈추었다. 어두워지면 자고 밝으면 일어난다. 너무도 훌륭하지 않은가. 이제 어떤 약속이나 의무, 속박, 임무, 특별한 야망은 없다. 나는 투쟁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고요한 권태의 시간과 장소에 놓여 있는 존재일 뿐이다.” (빌 브라이슨)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무라카미 하루키)
“어떤 면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납득하지 못했다. …… 그래서 그들은 가장 악랄한 현실 파괴도 서슴지 않고 받아들였다.” (조지 오웰)
“그는 나의 오후, 나의 자정, 나의 언어, 나의 노래였다 / 난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 별빛도 지금은 필요 없다 / 모두 치워버려라 / 달을 가리고 태양도 끌어내려라 / 이제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으니” (W. H. 오든)
“인간은 누구나 길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숱한 길들을 걸으며 우연과 운명의 무늬를 삶 속에 새길 뿐이다.” (박이문)
“혁명에서는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닙니다. 경제적 이익도 아니고 권력의 탈취도 아닙니다. 텍스트의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사사키 아타루)
“가부장제는 유례없는 지배 이데올로기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체제도 이와 같이 완벽한 지배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다.” (케이트 밀릿)
“격정은 언젠가 스스로 지쳐 사라진다. 하지만 이성은 스스로 기다릴 줄 알며 견뎌낼 줄 안다. 다른 것들이 흥분해 소란을 피울 때 이성은 침묵해야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이성의 시대는 온다. 그 시대는 온다.”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세상을 구했던 책들을 즐겨 읽어라.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져야 참다운 독서를 할 수 있다. …… 나보고 너무 실현성 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하지 말거라.” (정약용)
“단 하나의 미덕은 정의이고, 단 하나의 의무는 행복해지는 것이며, 단 하나의 명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드니 디드로)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길 같은 것이다. 원래 땅 위에 길은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
“나는 역사의 포로가 아니다. 내가 나아가는 세상에서 나는 나를 끊임없이 창조한다.” (프란츠 파농)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Oliver Sacks)
“사대부가 고담古談만 논하면서 오곡조차 구별할 줄 모르고, 쟁기와 보습과 가래를 구별할 줄 모른다. 어찌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농민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서유구)--- 본문 중에서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니라 텍스트의 변혁”이라고 일갈한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책은 세상을 구할 수도 있고, 심하게 망가뜨릴 수도 있다. 이는 단순히 저물어가는 책의 시대를 추억하는 말이 아니다. 책을 읽고 고민했던 그 “방황의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는 바로 우리의 읽기가 무의미하지 않으며, 우리의 지적인 삶과 행복은 그 한 줄 문장의 힘에 있음을 열정적으로 말한다.
이 책은 『매일경제』 신문 ‘BOOK’ 섹션에 연재했던 [허연의 책과 지성]에 쓴 글을 모은 것이다. 동서양은 물론 우리나라 출신의 시인과 소설가, 철학자, 사상가, 혁명가, 과학자 들의 책과 생각, 숨은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 곁을 떠난 소설가 박상륭, 움베르토 에코, 철학자 박이문, 비평가 존 버거, 신경학자 Oliver Sacks등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저자의 책 읽기는 동과 서, 고대와 현대, 그리고 장르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전개된다. 각 인물들의 대표작은 물론 수많은 평전과 해설서, 논문 등을 참고했다.
저자는 이러한 읽기를 통해 그들 사상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문장’들을 뽑아낸다. 그것은 단연 수년간의 책 읽기를 통해 축적한 내공의 산물이다. 즉, 저자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던”(본문 95쪽) 것이다. 이러한 문장들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향기와도 같다.
이 책은 책으로부터 구원받은 한 소년이 “‘책 읽기’라는 거대한 제의를 진행하고, 그 형식을 계승시키고, 사람들에게 짐짓 엄숙한 화두를 던지는 제사장”이 되기까지의 지적 편력을 서술한 한 개인의 ‘독서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이 독서록을 통해 그 자체로 ‘읽는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고, 이를 발판 삼아 더 넓고 깊은 지의 세계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의 종말이 공공연하게 선포되는 시대다. 하지만 끊임없이 무언가 읽고 쓰려는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책은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아 우리의 삶을 자극할 것이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는 그러한 책의 시대를 기록한 가장 촘촘하고 확고한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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