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 인문

반항의 거리, 이스트빌리지 화가 최동열 이야기

by It works 2019. 5. 19.




 

가난한 예술가들이 숨 쉬는 뉴욕의 뒷골목,
무한의 바다에 둘러싸인 히말라야에서 최동열을 만나다

북미대륙에서 독학으로 그림을 배워 미국은 물론 아시아, 유럽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재미작가 최동열이 화가로서의 인생 역정과 그림에 대한 꾸밈없는 생각을 담은 자전적 에세이다. 이 책은 청춘과 예술의 로망, 질투와 선망이 뒤섞인 이국적 문화와 여행, 그리고 저자의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엿볼 수 있다. 히말라야, 멕시코 바하 반도, 유카탄 반도, 캐나다 등 외국 각지를 살아온 그의 인생과 예술 세계를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책 말미에는 그의 사진과 작품들을 수록했다.

미국 뉴욕에서 신표현주의로 주목받은 화가
최동열의 삶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


16세 해병대 자원입대, 월남전 해병 첩보부대원으로 참전, 74년 도미….
클럽의 기도, 웨이터, 공장 일 등을 전전하다가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스로 무작정 떠났다. 동갑내기 화가이자 미국인 아내인 엘디를 만난 곳도 뉴올리언스였다. 그리고 글에서 그림으로 전향한 후에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며 엘디와 함께 멕시코 등지로 스케치여행을 떠났다. 78년 뉴올리언스서 첫 전시회를 열고 80년대 중반부터는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84년부터 ‘선임하사’라는 지프차에 미술도구를 싣고 엘디와 함께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해변과 정글의 원주민 마을에 머물며 그림을 그리다가 그림이 안 된다 싶으면 홀연히 미국 서부와 캐나다로 떠났다. 물감이며 캔버스를 살 돈이 없으면 웨이터를 하고 가면을 만들어 팔았다. 그 사이사이 야영지나 마을에서 수렵이나 채집으로 생활을 영위하며 그림을 그리는 두 화가의 삶은 감탄스러운 열정과 소소하고 우스운 에피소드, 그리고 가난한 예술가의 고난과 슬픔에 녹아 있다. 그 후, 뉴욕 이스트빌리지에서 활발한 작품 및 전시 활동을 펼치며 미술계의 새로운 기수로 주목을 받았다. 비로소 1986년 한국에서 귀국해 전시회를 하는 도중 딸 이솔이가 태어났다. 현재는 히말라야와 미국과 한국을 돌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저 자 : 최 동 열
1951년 피난 중 부산에서 태어났다. 경기중학교를 졸업한 후 검정고시를 거쳐 15세에 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에 입학했고, 16세에 해병대에 자원해 2년 동안 베트남전에 첩보대원으로 참전했다. 그 후 미국무성 초청 방문학생으로 도미, 유도와 태권도 사범, 공장 노동자, 바텐더, 술집 문지기 일을 하다가, 1977년에 화가이자 지금의 아내 L.D. 로렌스를 만나 회화를 접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멕시코 바하 반도, 유탄 반도, 캐나다 및 미국 서부를 전전하며 작품 활동을 펼친 후 뉴욕에 정착하게 되었다. 80년대 세계 미술의 본거지인 뉴욕 이스트빌리지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고, 신표현주의 젊은 기수로 주목받던 중, 1986년 한국에서 초청 귀국전을 열였다. 그 후 미국, 캐나다 홍콩, 한국 등지에서 활발한 전시 활동을 펼쳤다. 그는 현재 히말라야에서 그림과 글을 쓰고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전시를 하고 있다.

프롤로그

제1부 1974년, 미궁 속의 플로리다
제2부 고갱과 고흐를 만나다
제3부 자연으로의 본능적 귀화
제4부 집시들의 빵과 예술
제5부 멕시코 마야 정글의 코바
제6부 뉴욕 이스트빌리지를 포옹하다
제7부 회전목마의 귀향
제8부 한 많은 어머니의 품 같은 산천
제9부 연어를 만나는 풍경
제10부 히말라야

에필로그 나, 엘디라는 여자
화보

▷ 저는 한국작가들을 세계에 소개하고 뉴욕의 작가들을 동양에 소개하는 일을 하며, 히말라야에 미쳐 인도와 네팔을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인도는 아실 거고 네팔은 인도 북부에 근접해 있는 조그만 나라인데 큰 산들이 많아요. 백두산보다 두세 배 높은 산들. 하여튼 이곳들을 다니면서 산 등산을 하면서 작업하기 좋은 곳을 골라 그곳에서 한두 달 살면서 작업을 하는 거예요. 얼마 전에는 인도의 시킴에 한 달 반 있었어요. 너무 깊은 산속의 마을들이라 아마 삼촌 사시던 100년 전 모습과 같을 거네요.
--- p. 6

▷ 히말라야를 다니며 인도, 네팔 각지의 원주민들과 같이 생활하고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이들과 대화하면서 느낀 것은 세계가 움직이는 유랑의 시대인 현재의 젊은이들은 우리 집안을 이해할 수 있는 자유인들이에요. 인도와 네팔을 여행하다 보면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을 많이 만나요. 요사이 이스라엘 젊은이 다음으로 한국 젊은이들이 이쪽 여행을 많이 한다고 해요. 이들은 다른 문화들을 접촉하며 삶의 다양성을 느끼는 것 같아 좋아요.
--- p. 10

▷ 나는 그림을 시작하면서부터 고갱과 고흐의 그림들을 내 그림 수업의 교과서로 삼았다. 늦게 예술을 시작했으면서도 누구 못지않은 열정을 발산했던 두 사람이 쓴 편지, 개인 이야기, 작품마다 따르는 사연들을 엮은 책들을 아예 베개 삼아 가까이 두고 읽었다. 언젠가 엘디는 반 고흐의 작품들과 사연을 엮은 책을 가슴에 품고 있는 내 모습을 그리기까지 했다.
--- p. 68

▷ 사막의 늑대 코요테만 해도 신기하다는 듯이 잠깐씩 서서 우리를 바라보다가 제 갈 길을 갔다. 매일 저녁 일을 끝내고 식사 준비를 할 때면 잠자리 앞에 있는 바위 위에서 펠리컨 한 마리가 놀다 가기도 했다. 한 달을 쉬지 않고 계속 오더니 어느 날인가 우리에게 소개하려는지, 자기 애인을 데리고 와 다정히 앉아 있다가 가기도 했다. 귀가 당나귀처럼 생긴 사막 토끼들도 이미 우리에게 겁을 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 p. 97

▷ 아침 일찍 차에서 일어나 일을 나가는 엘디가 하는 말이, 남의 사정을 알 바 없는 손님들이 춥게 자서 빨간 자기 뺨을 보고 무척이나 건강해 보인다고 추켜세워준다는 것이었다. 이 말 끝에 엘디는 한참이나 웃었다. 오후에 일터로 나가는 나는 엘디가 나간 후에나 일어나 고속도로 옆에 차를 끌고 가 세운 뒤, 빅서에 있을 때부터 익히던 미국 민요인 애팔래치아 산맥 지방의 노래들을 퉁소로 연습했다.
--- p. 118

▷ 코바! 우리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자리 잡고 기막힌 움막 스튜디오까지 찾아낸 곳. 비록 지금은 인구가 1백 50명에 불과하지만, 물이 귀한 유카탄 반도 내륙 중앙 네 개의 호수에 둘러싸인 코바는 마야 문명이 번성기를 누리던 클래식 시대에는 통상의 중심지였고 마야 도시 중 제일 큰 도시(50킬로미터)였다. 그러다가 서기 900년경에 버려진 도시로 쇠락의 길을 걷다가, 지금은 정글 속에 드문드문 서 있는 큰 피라미드들만이 당시의 영화를 말해줄 뿐이다.
--- p. 131

▷ 태권도와 유도 사범, 바텐더로 일주일에 70~80시간을 일에 매달리니 돈이 모였다. 학비로도 충분할 것 같아 대학교를 알아보았더니 학비가 비싸 그동안은 엄두도 못 냈던 미국 사립대학의
입학이 생각보다 쉬웠다. 문제는 언어 시험이었다. 콜롬비아대학에서 언어 시험을 쳤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언어 학교를 일 년 다닌 다음 다시 언어 시험을 쳐야 했다.
--- p. 188

▷ 진도는 한국 남화의 고장이다. 나는 그곳 신동리에서 한국의 혼과 한이 담긴 한국 그림을 그리겠다며 묵으로 산세를 그리기 시작했다. 산세와 인간, 죽은 자를 신명 나게 떠나보내는 상여, 삼별초와 백제, 고려 등을 전전하며 작품을 만들고 여귀산으로 돌아와서는 서울에서 보내온 캔버스에 유화로 옮겼다.
--- p. 208

▷ 설산의 험한 모습과 인디안 노랑, 올리버 초록, 마젠타의 조화가 히말라야의 또 다른 모습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깊은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 풍경을 그려 내려오면서 드디어 그림 하나 망쳤구나 했던 것이 너무 보이는 데 치중하지 말라는 하나의 조언을 주는 작품이 된 것이다. 하지만 설산의 얼굴만큼은 흉악한 아름다움은 그대로 지니면서….

--- p. 238




댓글